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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장

백남기 농민

백남기 농민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은 1947년 8월 24일 전남 보성군 옹치면에서 출생하였다. 광주서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중앙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였다. 1971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에 반대하는 시위로 1차 제적되었고, 1973년10월 유신철폐 시위를 주도해 수배되었다. 이 무렵 천주교 세례(세례명 임마누엘)를 받았고 2차 제적되었다. 갈멜수도원 잡부 1년, 일흥농원 포도원 1년, 갈멜수도원 수도사로 3년을 보내고 1980년 복교하였고, 서울의 봄 때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를 주도해 계엄군에 체포되었다. 이때 3차 제적되었고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81년 3·1절 특사로 가석방되었고 고향 보성으로 귀향해 농업에 종사하였다. 1986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이래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의장, 전남연합회장, 전국부회장을 지냈고 ‘우리밀살리기운동’에 전념하였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대회 행사 중 폭력경찰의 살인적인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의식불명 상태에서 317일간의 사투 끝에 2016년 9월 25일 오후 1시 59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운명하였다. 경찰의 부검영장 강제집행 시도로 장례를 지르지 못하다가 사망 42일 만인 2016년 11월 5일 민주사회장을 치렀다. 고인의 유해는 광주 망월동 5·18 구묘역에 안장되었다. 고인은 부인 박경숙(율리아나)과 사이에 도라지, 민주화, 두산 등 삼남매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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