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고 비우고

채비 이야기

2024.03.14 00:00

[채우고 비우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



지난주 화요일(3월 5일) 저녁 9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어떤 제목을 스치듯 보고 손을 멈췄다. PD수첩 <나의 죽음에 관하여>.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죽음, 노인, 웰다잉 이런 단어를 보면 관심이 간다. 이날 방송 주제는 ‘조력 사망’이었다. 조력 사망? 누군가의 도움으로 생을 마치는 것?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고통 속에 있는 많은 이들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

이날 방송에서는 조력 사망에 대한 윤리적, 법적 담론을 심층 조명했다. 지금까지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한 한국인은 확인된 것만 최소 12명에 이른다. 이들은 왜 스위스로 가야만 했을까. 제작진은 그들의 흔적을 쫓았다. 제작진은 스위스를 방문했고 어렵게 A 조력사망단체 회장을 만나 조력 사망의 과정과 행해지는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제작진은 조력 사망을 선택한 한국인 고 허모 씨의 유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떨어져 지낸 지 10여 년 만에 스위스에서 만났다는 아들 허씨는 아버지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말이 있다고 한다.

“아들아, 나는 자살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존엄한 마무리를 하려는 것이다.”

폐암 말기였던 아버지에겐, 온전한 정신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던 것. 아들은 아버지가 오히려 고통에서 해방된다며 후련해 보였다고 한다.

​2023년 말, 이명식 씨와 그의 딸은 조력 사망을 허락해 달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직장 생활을 마치고 제주에서 새 삶을 계획했던 이 씨는 상세 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한 뇌척수염으로 하반신 마비와 환상통에 시달리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 최대 용량 처방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 극단적인 생각에 떠밀리던 이 씨는 스위스의 조력사망단체를 알게 되면서 한 줄기 희망을 얻었지만, 딸의 도움 없이는 스위스로 갈 수 없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자살해야겠다고 하면 나를 찌르는 것밖에 없거든. 이거를 가족이 처리해야 되나 그런 거. 그걸 내가 남겨줘야 되겠나? “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일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잠자다 가는 것’이 대부분의 소망이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이가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이 예기치 않은 병이나 사고로 병원 침상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원인불명의 척수염으로 하반신 마비에 걸린 사람, 뇌동맥류 수술 후 후유증으로 극심한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사람, 뇌출혈로 쓰러진 뒤 움직이지 못하고 8년째 누워만 있는 사람, 그들이 말하는 존엄한 죽음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연명 치료가 반복되지 않는 것’이었다. 남의 도움 없이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못 하는 상황, 그렇게 연명하며 맞이할 죽음은 결코 그들이 바라는 ‘존엄한’ 죽음은 아니었다.

방송에서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주제로 한 영화 ‘소풍’의 주연 배우 김영옥, 나문희 씨가 '등장한다. 배우 나문희 씨는 오랜 시간 투병 끝에 작년 겨울 사별한 남편의 이야기를 전하며, ‘저도 나중에 병에 걸리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지만, 그 치료가 내 존엄성까지 해친다면 연명 치료를 포기할 것 같다’라고 밝혔다. 당하는 죽음보단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을 원한다는 두 배우.

올해 1월로 육십을 맞이한 나는 지난 1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2월에 등록증 카드를 발급받았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앞둔 대한민국에서는 어떻게 사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큰 화두로 등장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 수가, 제도 시행 약 5년 만인 지난해 200만 명을 돌파했다.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등 여러 나라가 ‘조력 사망’을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2년 전 국내에서도 처음으로 조력 사망을 허용하자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안규백 의원 등 12명의 국회의원이 공동 발의한 이른바 ‘조력 존엄사법’이다. 해당 법안은 극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일 경우 본인이 희망하면 조력 사망을 허용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 차례 논의된 후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스위스 조력사망단체 <디그니타스>를 통해 생을 마감한 외국인은 3,400여 명이 넘으며, 한국인 회원도 12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사회는 죽음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일까. 조력 사망에 대한 신중한 논의가 필요한 때이다.

김경환 |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

‘채우고 비우고’는 삶과 죽음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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