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고 비우고

채비 이야기

2024.05.09 00:00

[채우고 비우고] 호모루덴스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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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선생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서울 마포구 당원이었고 난 그 두 당의 마포구 위원장이었다.

또한 수년 간 마포 ‘민중의집’ 공동대표를 함께 했다.

당 사무실도 그렇고 민중의집 사무실도 그렇고, 모두 홍세화 선생의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초창기 홍세화 평당원의 일상은 단순했다.

당시에는 진보정당이 어느 정도 활성화돼 있던 시기였기에 거의 매일 밤 당원들의 술자리가 있었다. 강연 혹은 글쓰기를 마치면 늘 늦은 시간 퇴근하는 홍세화는 내게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문자를 보냈다. 당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당원들은 당연히 명망가인 홍세화 선생님이 뒤풀이 자리에 온다고 하니 들뜰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기다리던 홍세화 선생이 술집에 도착한다. 환호성이 울린다. 그리고 특유의 그 짧은 인사말.

"아, 안녕하세요. 홍세홥니다. 반갑습니다. "

수줍게 시작했지만 술이 한잔씩 돌면 홍세화 선생님은 ‘영업본색’을 드러낸다.

그래. 이제부터가 홍세화 타임이다. 무림의 고수처럼? 혹은 생활의 달인처럼 당원들을 향해 종이를 날렸다.

한겨레신문, 한겨레21, 학벌 없는 사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구독신청서다. 한겨레신문을 구독 중이라고 하면 한겨레21 구독신청서를 내밀었고, 둘 다 구독한다고 하면 르몽드 디플로마티그 구독신청서가 날아 왔다.

구독신청서는 마르지 않았고, 철마다 업데이트가 됐다. 어느 단체에 가서 강연을 하고 나면, 그 단체의 구독신청서를 왕창 가지고 와서 뿌리는 식이다.

그는 맥주 한잔을 하고 구독신청서를 챙긴 뒤 흡족한 표정으로 퇴장하곤 했다.

나는 이런 유형의 지식인은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명망가, 지식인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홍세화 선생에게 영업은 곧 신념이었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 실천이 결여된 진보는 공허하다는 것. 당원들이 가가호호 방문해서 설득해야 한다고, 다소 고전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홍세화 선생은 사람들이 <한겨레>를 읽는다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한겨레21>을 읽으면, 시민단체의 회원으로 강연을 듣고 활동하면, 세상이 조금씩 진보한다고 믿었다. 홍세화 선생에게 지역은 영업의 공간이자 노는 공간이었다.

우린 정말 많이 놀았다.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홍세화 선생님은 당구를 좋아한다.

어느 날인가 거리를 함께 걷다가 지하 당구장을 발견하자 불쑥 한게임 하자고 말했다.

알고 보니 당구 50. 태권도로 치면 하얀 띠 수준이었다.

내가 당구 점수 올려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맨날 책을 읽고 강연을 하는 인생에서 ‘어디서 좀 놀 줄 아는’ 장년으로 만들고 싶었다.

만남이 늘수록 당구 레벨이 올라갔다. 50에서 80으로, 80에서 100, 120, 150으로. 차곡차곡 당구 점수를 올렸다.

홍세화 선생은 당구장에서 자장면 먹는 맛도 배웠다. 마치 고등학생처럼 우리는 자장면을 허겁지겁 먹으면서 서로의 플레이를 ‘겐세이(견제)’ 하기 바빴다.

우리의 당구는 점점 지저분해졌고 품격 따위 집어던졌다.

당구장에서 홍세화는 교복을 풀어헤치고 모자를 삐딱하게 쓴 불량한 청소년처럼 변신했다. 그래, 그곳은 우리의 해방구였다.

물론 당구를 치면서도 영업사원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선생은 당구장에서도 영업했다. 본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호감을 나타내면, 그 틈으로 비수처럼 구독신청서를 들이밀었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민중해방’이나 ‘민중이 주인인 세상’을 외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자기 지역에 ‘민중의 집’을 짓는 일이다. 우리는 많이 보았다. 입으로는 진보나 민중을 말하면서 실제 삶은 소시민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내일 큰일을 도모한다면서 오늘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사소한 일이라며 실천하지 않는 너무 커버린 사람들을

<한겨레> 홍세화 칼럼 ‘여기가 로두스다’ 중

홍세화 선생에게 지역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장이자 동지들과 웃고 떠들며 노는 공간이었다. 명절이면 독거노인이라 갈 때가 없다며 민중의집을 방문했다. 승부욕이 남달랐던 선생은 화투와 바둑에도 능했다. 짝짝 화투패를 내리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돈을 따면 절대 돌려주지 않고 돈 잃은 후배를 놀리기 바빴다.

지난해 선생이 암이라는 소식을 듣고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의 답장은 간략했다.


"호모루덴스. 세진이랑 일산에 당구 치러 와라"

암환자 홍세화와 당구를 쳤다. 홍세화 선생의 당구 레벨은 어느덧 200대에 이르렀다.

일산과 마포를 오가며 우리는 다시 당구장을 들락거렸다. 암 따위는 잊은 듯 희희낙락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당구장에서 짜장면, 탕수육에 소주를 시켜 먹고 마시며 포복절도 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자장면을 들이켜듯 먹으며 상대방 공을 쳐다보느라 바빴던 홍세화의 눈동자가 애타게 그립다.

잘 가요. 나의 영원한 맞수.

행복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정경섭 |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 이사(동물의집 대표)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이자 언론인, 사회운동가인 홍세화 씨가 2024년 4월 18일 별세했다. 향년 77세.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한겨레신문사 사우장으로 치렀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의전을 담당하고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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