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고 비우고
채비 이야기
[24%의 기적] 노년에도 죽음에도 정답은 없다
- 2026.09.14 채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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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 노화, 웰에이징, 성공적 노화, 액티브 시니어. 현대사회는 이상적인 노년의 상을 부지런히 제시한다. 그 말들 속에서 노년은 자연스러운 생애 단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하고 개선해야 할 프로젝트가 된다. 병들고 쇠약해지는 일, 생산성이 줄어드는 일이 개인의 실패로 읽히는 순간, 젊은 시절의 평가와 자기 관리 압박은 이름만 바꾼 채 노년까지 연장된다.
노년학 연구자 주지현의 <미술관에서 노년을 만났습니다>(혜윰터)는 여기서 한 걸음 물러 선다. "어떻게 안 늙을 것인가"도 "어떻게 잘 늙을 것인가"도 아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고흐와 밀레, 고야와 모네, 프리다 칼로와 렘브란트, 메리 카사트의 화폭을 따라가며 노화와 돌봄, 관계와 상실, 기억과 죽음을 들여다본다.
저자의 제안은 어릴 적 장래 희망을 그리듯 '노년 희망'을 미리 그려보라는 것이다. 연금과 보험, 건강관리와 은퇴 준비를 넘어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싶은지를 구체적으로 그리는 일 말이다. 잘 늙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방식과 품위를 잃지 않는 일이므로, 삶이 그렇듯 노년에도 정답은 없으며, 노년은 먼 미래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오늘이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인상적인 것은 화가들이 노년을 다루는 태도다. 렘브란트는 평생에 걸쳐 자화상을 남기며 파산과 상실로 무너져가는 자기 얼굴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다. 감추지 않은 주름과 흐려진 눈이 오히려 한 사람의 생애를 가장 정직하게 증언한다. 노년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갖는다.
우리는 이 대목 앞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 각자의 삶이 그토록 다른데, 마지막 페이지는 왜 이렇게 똑같아야 하는가.
첫째는 비용이다.
선불식 할부거래 시장은 올 3월 말 선수금 11조 3천544억 원, 계약자 1천131만 명에 이르렀다. 국민 다섯 중 한 명이 가입자다. 문제는 그 덩치가 신뢰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계약 때 1천만 원 선으로 안내받은 유족이 1천600만 원짜리 정산서를 받아 드는 일이 여전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장례식장 표준약관을 손질해 시설 임대료와 수수료, 용품비, 청소·관리비를 나눠 사전에 설명하도록 한 것도 그래서다. 다만 표준약관은 강제력이 없다.
둘째는 획일화다.
화장률은 올 4월 95.2%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그런데 의례는 여전히 매장 시대의 3일장을 고수한다. 빈소와 조문, 접객으로 짜인 회전율의 문법 안에서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시설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전국 화장로 400기 가운데 수도권 몫은 25.8%에 그쳐 원정 화장이 이어지고, 관외 화장료는 평균 65만 원으로 관내 10만 원의 6.5배다.
셋째는 홀로 맞는 죽음이다.
서울의 무연고 사망자는 2019년 529명에서 2024년 1천396명으로 5년 새 2.6배 늘었다. 1인 가구는 804만 5천 가구로 전체 가구의 36.1%를 차지하고, 2024년 고독사는 3천924명으로 집계됐다. 공영장례가 제도화됐지만 낮은 예산 단가 탓에 빈소 없는 화장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세 문제의 뿌리는 하나다. 죽음을 처리해야 할 사건으로 다루는 관성이다. '얼마나 비싼 수의냐'에서 '이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담을 것이냐'로 옮겨가야 한다. 고인이 살아온 일과 아끼던 것을 의례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역량, 그것이 앞으로의 차별화다. 공영장례 역시 최소 비용이 아니라 최소 품위를 기준으로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저자의 말대로 오늘 건네는 말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켜켜이 쌓여 각자의 노년을 만든다면, 장례는 그 마지막 장을 대신 써주는 일이 아니라 이미 쓰인 문장을 정확히 읽어주는 일에 가깝다. 노년에 정답이 없듯 죽음에도 정답은 없다. 정답 없는 이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치를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고민할 지점이다.
김경환 |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
*전체 납입금 중 운영비율을 의미하는 ‘24%의 기적’은 조합의 중요한 이슈와 가치를 담은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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