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고 비우고

채비 이야기

2026.08.11 00:00

[채우고 비우고] 우리는 왜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는가


“그렇게 슬픈 얼굴하고 있으면,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슬퍼하지 않겠어?”

어느 날, 전 직장 상사가 저를 부르더니 느닷없이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순간 당황했고, 어떤 말도 하지 못했으며, 곧 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니, 나와 엄마의 관계를 알지도 못하면서 왜 저렇게 말하지?’ ‘남의 슬픔이나 아픔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애도를 저렇게 막지?’ 당시 업무를 소홀히 했거나, 근태가 나빴거나, 동료들과 갈등이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암 투병 중이셨지만, 어머니는 호전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살아계실 때 어머니의 주기적인 병원 방문을 위해 연차를 써가며 모셨고, 그는 그 과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슬픔과 애도의 길에 그는 갑자기 제동을 걸었습니다. 슬픔이 흐르는 길을 차단했습니다.

애초 그에게는 위로의 의도가 있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 표현이 잘못됐습니다. 저는 위로받기보다는 이 회사가, 사무실이 안전한 공간이 아님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표현은 의도에 맞게 해야 하지만, 평소 권위적 형태를 보여온 그에게 기대할 건 아니었습니다. 그가 회의 석상 등에서 늘 꺼내던 성찰은 정작 그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죽음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애도는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살면서 상실은 피할 수 없고, 도처에 널려 있지만, 많은 사람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 때문일까요? 거대한 사회적 재난이나 참사 앞에서도 애도는커녕 죽음을 조롱하고 혐오하는 이들이 넘칩니다. 혹은 사별에 따른 슬픔을 치료해야 할 질환처럼 다루기도 합니다.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경험이지만, 의례가 끝나면 상실과 슬픔을 함께 무덤에 묻어야 할 무엇처럼 여깁니다. 이는 사회적 문제입니다.

《왜 나의 다정함이 당신을 상처 입힐까》에서 저자이자 철학자 지카우치 유타는 선의의 ‘헛발질’을 말합니다. 선한 의도를 지녔지만, 남에게 되레 상처를 주고 마는 흔한 경우입니다. 저만 겪은 건 아닐 겁니다.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있습니다. 지카우치는 그 이유를 그 사람의 이야기를 보려고 하지 않아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맥락’과 연결돼 있습니다. ‘어차피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거’라며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누구든 순간으로만 존재하지 않지만, 편견은 쉽게 자리를 잡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의 총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모든 만남과 그 흔적의 누적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 별자리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별(특정 순간이나 상황)이 아닌, 별자리 전체를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떠서 읽어야 가능합니다. 지카우치는 그래서 진정한 선의는 남에게 ‘소중한 것’을 알아볼 때 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합니다. 의도와 달리 상처 주고 고통을 안깁니다. 진정한 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상처를 줬던 그 상사는 저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는 건, 그 슬픔(혹은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임을 고려하면, 그의 빈약한 언어는 결국 관계와 이야기를 흐릿하게 만들었습니다.

‘애도 리터러시’를 생각했습니다. 리터러시(문해력)는 본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나, 요즘은 더 나아가 세계를 파악하고 해석하며 비판하는 역량까지 일컫습니다. 애도하는 데 문해력이 필요해?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애도 리터러시는 단지 제대로 애도하는 방법을 아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상실과 슬픔을 마주한 이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더라도, 그것에 공감하고자 하는 마음, 슬픔이 흐르는 길을 막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내가 맞닥뜨리게 될 상실과 슬픔이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며, 그 의미를 언어 등으로 표현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에 만연한 슬픔과 관계 맺는 역량입니다. 별들(이야기) 사이에 길을 놓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그 회사를 나왔습니다. 저 무례한 말이 퇴사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애도 감수성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도 사회적 감수성 떨어지는 상사와 함께 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애도가 서툰 우리 사회를 생각했습니다. 기실 애도 리터러시는 삶과 생명에 대한 이해를 돕습니다. 이는 세상의 상실과 슬픔이 이전과 다른 밀도로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상실과 슬픔 속에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내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을 건넵니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세계의 결이 고화질 영상처럼 한층 또렷해집니다.

상실의 슬픔에 열려 있는 사회, 슬픔이 4대강 보의 강물처럼 갇혀있지 않고 흐를 수 있는 사회를 생각했습니다. 펫로스(반려동물 사별)를 겪은 반려인 슬픔에 “유난 떤다”라고 냉대하는 사회적 몰이해와 편견에 균열을 내고 싶었습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원으로서 한국 사회의 애도‧추모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싶었습니다. 이에 다른 조합원과 함께 사진치유 기반 펫로스 추모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이음온아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함께 한국 사회의 애도 문화를 향상하고 애도 리터러시를 높이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애도 리터러시는 상실의 슬픔을 감각하고자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와 같은 무례한 위로를 내뱉는 게 아니라 얼마나 그가 슬플지 헤아려보는 일이 애도 리터러시의 첫걸음입니다. 그렇게 헤아려보고자 하는 마음이 쌓이고 쌓이면 나만의 애도 어휘와 표현이 자리잡습니다.

그래도 어렵다고요?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 말 않고 묵도(默禱)하면 됩니다. 슬픔이 흐르는 길을 막지 않고 관계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읽고자 노력하는 사이, 애도에 관한 근육도 조금씩 붙을 겁니다. 소중한 존재를 잃고 비애와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을 제대로 위로하고,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를 꿈꿉니다. “주의 깊은 시선이 밝혀줄 아름다운 세계”를 믿고 싶기에 별들 사이에 길을 놓고 싶습니다.

김이준수 조합원

‘채우고 비우고’는 삶과 죽음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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