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고 비우고

채비 이야기

2024.06.07 00:00

[채우고 비우고] 엄마와 함께 한 일년

아침이면 새소리에 눈을 뜨고 커튼을 열면 계절 따라 나무와 하늘의 변화를 볼 수 있었던 곳, 그리고 시작되는 일상. 전.진.상 호스피스 102호. 엄마와 지구별에서의 마지막 일 년을 보낸 곳입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전.진.상에서 보낸 시간은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련합니다.

폐가 거의 기능을 잃고,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 잠시 앉아 있기도 힘드셨던 엄마는 몸을 벗는 마지막 날까지 맑은 정신으로 매일 기도를 하고 본인의 힘으로 식사를 하고 볼일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저는 ‘적당히 다른 사람의 도움을 좀 받으시지'라며 그런 고집스러움에 화도 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마지막 순간까지 본인의 의지와 소신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신 엄마가 멋지고 자랑스럽습니다.

살아서 병원 가길 그리 싫어하셨건만 전.진.상에서 보낸 일 년 동안 집보다 더 편하다고 하셨던 걸 보면 전.진.상은 엄마에게 병원이기보다 따뜻한 안식처였나 봅니다. 대학병원에서 선고받은 2주라는 기간이 무색하게도 엄마는 이곳에서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사계절의 변화를 병실 창밖을 통해 지켜보며 꽉 채운 일 년을 보냈습니다.

저도 엄마 못지않게 호스피스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24시간 같은 공간에서 아픈 가족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엄마와의 묵었던 감정들이 드러나도 벌거벗은 모습으로 마주해야만 했고 새벽에 눈을 뜨면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로 힘들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스피스에서 엄마와 보낸 일 년은 몇십 년 함께 살아온 세월보다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간 시간이었고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이 시간이 없었다면 엄마도 저도 가족들 모두 준비되지 않은 채로 이별해야 했을지 모릅니다. 제가 이곳에서 충분히 힘들어하고 맘껏 즐기고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엄마도 그랬으리라 믿어요.

전.진.상에서의 일 년은 저에게 크고 작은 깨달음으로 축복받은 날들이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엄마의 육신을 지켜보는 일은 매일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하게 했고, 통증이나 죽음이 일상인 이곳에서 존재가 가진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사유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질문하게 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삶을 잘 살아내는 것임을 엄마와 그곳에 계신 분들이 곁에서 보여주시고 메시지를 주었어요. 병원 관계자들은 엄마의 마지막 삶이 편안하도록 진심으로 배려와 케어를 해주셨고 엄마는 최소한의 의료적 도움으로 스스로 깨어있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있음의 또 다른 형태임을 알아간 시간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요. 여전히 자주 망각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시간을 흘려보낼 때도 있지만 죽음을 더 자주 사유하고 저 또한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며 살고자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한 달 반 전쯤이었어요. 발 마사지를 해드리는 동안 엄마는 발치 끝에 앉아 있는 저를 지긋이 내려다보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코에 산소 줄을 꽂고도 한 마디 내뱉는 것조차 힘들어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가셨어요. 친척들 이야기,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띄엄띄엄하던 엄마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하신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그리고는 다시 힘겹게 다음 말을 이어갔습니다. 자신이 왜 사는지 알겠노라고, 오랜 시간 성경을 공부하면서 머리로만 이해했었던 것을 이제 가슴으로 알겠노라고. 평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잘 내어놓지 않는 분이었기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엄마를 보며 ‘이제는 정말 떠날 준비가 되셨나 보다’라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종의 순간은 평화로웠습니다. 바로 옆에서 마지막 숨이 나가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고 엄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 부럽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벼웠습니다. 전.진.상의 모든 선생님들, 직원분들, 봉사자분들에 대한 감사함은 저 또한 그 뜻을 세상에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보답하고자 합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써주는 분들, 환우들과 그분들 곁에서 그분들만큼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 가족들에게 응원과 사랑을 보냅니다.

엄마도 어딘가에서 미소 지으며 말씀하실 거예요.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 모두 행복하세요.”

김하정 |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조합원

‘채우고 비우고’는 삶과 죽음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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