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고 비우고

채비 이야기

2024.08.09 00:00

[채우고 비우고] 그 사이

‘사이’는 ‘조금 멀어진 어느 때부터 다른 어느 때까지의 비교적 짧은 동안’을 뜻한다. 내게 이 말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 날이 있었다. 대학 시절 동아리 행사 때 무언가를 해야 했는데, 토론 끝에 혼성 4중창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 넷 중 둘은 어느 정도 잘 불렀지만, 나와 다른 친구는 겨우 박자와 음정을 따라가는 수준이었다.

그때 선정된 곡이 ‘Let it be me’와 ‘그 사이’였다. ‘Let it be me’는 애벌리 브라더스가 불러 히트한 곡이고 ‘그 사이’는 김민기가 만들고 부른 서정적인 노래다. 기타를 잘 치고, 노래를 꿰고 있던 친구가 선곡했다. 어설프게나마 각자 화음 파트를 나누고 며칠 동안 열심히 연습했다. 마침내 행사가 시작됐고, 우리 순서가 와서 정신없이 무대에 올라 두 곡을 불렀다. 어떻게 무대를 내려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래도 박수를 받았던 것 같다.

어두웠던 사춘기 시절, 어렵사리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을 구해 밤새 들었다. ‘아악’하는 비명으로 시작되는 그 노래들. 그때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노래극이라는 장르는 생소했고, 낡은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은 하나같이 아프고 처절했다. ‘공장의 불빛’과 ‘이 세상 어딘가에’의 몇 구절은 지금도 생각난다. 그 테이프는 한국도시산업선교협의회와 김민기가 제작해 배포한 녹음테이프의 복사본이었다. 나는 테이프가 끊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다.

김민기는 외로운 내 인생 굽이굽이마다 위로와 힘을 주었다. 나는 학전소극장에서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세 번 보았다. 아마 지치고 힘들 때였을 것이다. 그때 보았을 배우들은 지금 영화와 드라마, 음악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세 번째 공연은 아이들과 함께 보았다. 내가 느꼈을 감동을 아이들도 느끼길 바랐다. 공연을 본 며칠 후 아이들은 먼 나라로 떠났다.

김민기 2집에 수록된 ‘그 사이’는 서정적이고 따뜻하고 아련하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 시선은 어느새 어딘가 먼 곳을 향하게 된다. 밤과 낮 그 사이, 이만치 떨어져 바라볼 그 사이, 이리로 또 저리로 비껴가는 그 사이. 우리는 그 사이에 있다. 삶과 죽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 그 속에 우리가 머문다. 나는 그 풍경이 슬프도록 아름답다.

사이는 시작과 끝의 시간을 말한다. 끝과 시작의 시간이기도 하다. 사이는 또 아래와 위, 위와 아래에도 존재한다.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시간과 공간이 사이이다. 나는 지금 어느 사이에 있을까. 스무 살 시절부터 품어온 질문은 풀 길이 없다. 그저 해 저무는 들녘을 바로 보며 어딘가를 꿈꾸고 있을 뿐. 어쩌면 인생이란 위태롭고 불안한 시간의 연속이 아닐까.

김민기는 ‘노을 저 건너에 별들의 노랫소리 밤새도록 들리는 그곳에 가련다’고 노래했다. 이제 그는 가고 없지만 내 마음속 김민기는 영원히 살아 있다.

김경환 |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

‘채우고 비우고’는 삶과 죽음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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