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국민 열 명 중 일곱 명(71.8%)이 자기 장례는 빈소 없이 치러도 괜찮다고 했다. 50대는 80.0%, 60대는 79.5%였다. 직접 장례를 겪은 세대일수록 이 대답이 확실하다.
이웃 일본은 이 흐름을 우리보다 먼저 걸었다.
가마쿠라신쇼(鎌倉新書)가 2년마다 실시하는 「장례에 관한 전국조사」에 따르면, 한때 절반을 넘던 일반장(3일장) 비중은 2024년 30.1%까지 낮아졌고, 가족장이 50.0%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직장을 치른 유족 가운데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한 이는 38.7%뿐이었다. 후회의 이유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은 "밤샘을 하지 못한 것", "이별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었다.
다시 우리 현장으로 돌아와서 무빈소가 증가한다는 숫자만 보면 결론이 쉽다.
사람들은 장례에 돈 쓰고 싶지 않고, 번거로운 것도 싫어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지난 반세기, 우리 장례에는 슬픔의 자리가 좁았다. 상주는 육개장 그릇 수를 세고, 부의금을 정리하고, 얼굴도 잘 모르는 조문객에게 밤새 고개를 숙였다. 사흘이 지나면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상조회사와 전문 장례식장은 돈벌이에 여념이 없었다. 슬퍼해야 할 유족이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으니 지쳐버렸다. 장례란 그저 돈 쓰고 피곤한 행사일 뿐이다. 부모의 장례를 그렇게 겪은 후 자기 장례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최근 증가하는 ‘무빈소 장례’ 선호도이다.
그런데 같은 조사결과에서 응답자들은 이렇게도 답했다. "화려한 형식보다 고인의 삶을 진심으로 추모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에 85.3%가 동의했다. 좋은 장례의 조건으로 '고인의 뜻을 반영한 장례'(47.5%)를 꼽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도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유족이 되었을 때 접객 부담 없이, 의미 없는 비용 지출로 고민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배웅하고 싶어한다. 고인의 생전 사진을 오래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 가족끼리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문제는 그런 애도의 방법이 지금 장례시장에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3일장 패키지 아니면 빈소 생략, 이 두 갈래밖에 없다. 그러니 지친 유족은 어쩔 수 없이 '생략' 쪽을 고른다. 그리고 장례 후 유족은 자책감에 시달린다. 빈소가 있든 없든 애도가 있는 장례를 만들어야 한다.
애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곳이 있다. 바로 공동체 장례이다.
최근에 무빈소가 늘어나는 원인 중 하나는 1인 가구의 급속한 증가이다. 혼자서 장례를 치르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무대책의 도시화 정책이 낳은 안타까운 상황이다.
상조 사업이란, 전문 장례식장이란 바로 그 도시에서 성장한 장례 산업이다. 무빈소 장례 증가라는 현상에는 혜성처럼 떠돌다 혼자 소멸하는 도시인의 삶과 죽음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공동체가 있어 장례를 같이 해줄 수 있다면 지금의 무빈소 장례는 있을 수 없다. 애도는 원래 마을의 일이었다. 상포계(相扶契)라는 이름으로, 이웃이 상여를 메고, 음식을 나르고, 밤을 함께 새웠다. 슬픔을 나누어지는 관계망이 마을 안에 있었다.
채비는 공동체로 애도하는 장례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실천이다. 채비 장례를 만들어 온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유족이 될 조합원이 주인으로서 운영한다. 재무적 성과보다 유족의 슬픔과 필요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
고인의 사진과 유품을 올린 자리, 생애사 낭독, 고인이 좋아하던 노래 한 곡. 접객 부담은 덜어내고, 애도할 시간은 늘렸다.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공영 장례 조문 활동을 하는 한겨레두레의 조합원들이 있다.
최근에 은평, 부천 등 서울과 경기도 곳곳에 활동하는 채비 플래너들이 상업 장례 회사들을 따라 멀리 집 나갔던 마을 장례를 다시 살던 곳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이런 실천이 특별하다기보다, 원래 있어야 했던 자리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편이 맞다.
그러니 무빈소를 이야기할 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말해야 한다. 무빈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겉치레와 접객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애도를 놓는 일이다. 비용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슬픔에 온전히 머무를 시간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다.
유족의 바람과 피로감을 뭉뚱그려 부르는 <무빈소 장례>라는 이름 대신에, 고인과 유족과 그 공동체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채비 장례>라는 이름을 얼른 손에 쥐어주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