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 자신의 장례를 미리 치러보는 자리였다. 수십 번의 추모식과 모의 추모식을 진행했지만, 이번에는 좀 긴장이 되었다. 임기헌 활동가와 함께 준비를 시작했다. 접질려 반기브스를 한 발로 화훼단지에 가서 손수 작은 국화를 준비해왔다.
추모식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손 대표를 오래 알아온 사람도 있었고, 오늘 처음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한마음으로 그의 삶을 공동체의 기억 속에 담아내려 했다. 추도사가 이어졌다.
어린 시절 영화숙재생원에서 겪었던 학대와 폭력,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한 손 대표의 투쟁, 함께 고난을 겪었던 동지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들은 서로를 지탱하며 여기까지 왔다. 지인이 하모니카로 '아침이슬'을 연주했다. 추모 영상이 흘러나왔다. 그에게는 그 흔한 어린 시절 사진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함께 노래를 불렀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군대를 못 간 것이 한이 되어 손 대표가 애창곡으로 삼았다는 노래였다.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후렴구를 여럿이 한 목소리로 불렀다.
손 대표가 좋아하는 작고 향기로운 들국화를 하나씩 들고 나와 헌화했다. 그리고 가슴을 맞댄 허깅을 나눴다. 경상도 사람들은 그런 포옹을 어색해할 거라 생각했지만, 모두가 너무나 뜨겁고 즐겁게 껴안아서 놀랐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1부 모의 추모식을 마치고 2부 논의가 시작되었다.
영화숙재생원 피해 생존자 선생님들의 노년의 삶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장례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것인가. 일본의 계약가족(LISS) 사례를 보며 생활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한겨레두레가 장례를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여러 의견이 오갔다.
늦은 시간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부산반빈곤센터 '공간달품'의 시간이 계속 따라왔다. 그 따뜻한 포옹들과 불빛이 마음에 남았다.
누구나 원하는 방식대로 걱정 없이 임종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