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비장례
지난 3월, 진안군 정0면 노인대학에서 채비학교를 수료하신 박00 어르신께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말씀이 적고 늘 조용하셨던 박00 어르신은 채비학교 수업에서도 발표나 질문보다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녀에게 유언 남기기’ 수업 시간에 아버님은 조심스럽게 유언 영상을 남기셨습니다. 그 영상은 USB에 담겨 한지로 만든 아름다운 채비함에 담겨, 수료식 때 정중히 선물로 드렸습니다.
빈소를 찾았을 때, 상주로 계신 따님들께 여쭈었습니다.
“혹시 채비함 안에 담긴 USB, 열어보셨나요?”
그러자 따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오전, 온 가족이 함께 아버지의 유언 영상을 봤어요. 모두가 펑펑 울었어요. 갑작스러운 사고로 너무 황망하고 슬펐는데, 영상 속 아버지의 마지막 인사를 보고 나니 정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런 귀한 일을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번 큰 따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님을 기억하며 몇 마디를 청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7남매의 장남이셨어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빚까지 남기셨지만 아버지는 그 모든 짐을 짊어지고 고향을 떠나 도시의 청소 현장에서 일하셨어요. 그렇게 저희를 모두 대학까지 보내셨습니다.
퇴직 후에는 다시 고향 진안으로 내려가셔서, 마을 노인회장을 맡아 늘 마을을 위해 애쓰셨고요.
코로나가 시작되던 즈음, 뇌졸중으로 몸이 많이 약해지셨어요. 그래서 제가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를 모시려던 참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시게 된 거예요.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 채비학교를 통해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감사해요. 남은 가족들에게도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진안채비협동조합은 박00 어르신을 보내드리며, ‘채비’가 가지는 깊은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단지 자신의 존엄한 죽음을 위한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할 수 있는 따뜻한 배려이자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진안채비협동조합은 앞으로도 조합원들과 함께 가보지 않을 길을 차분히, 그러나 깊이 있게 걸어가려 합니다.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이 여정이,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또 하나의 길이 되기를 바라며.
이수만 | 진안채비장례협동조합 이사장
*진안채비장례협동조합은 2024년에 전북 진안에서 새로운 장례문화를 일구고, 임종돌봄을 하고자 하는 진안거주 조합원들이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연합회와 협력하여 설립하였고, 한겨레두레와 같은 뜻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