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독하시단 요양원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도착했더니 숨을 가쁘게 내쉬고 계셨다. 얼마나 위중한지 표시해 주는 산소포화도 (혈중 산소 농도)가 한때 50 이하로 떨어졌다는데 우리 부부가 옆에서 말도 하고 손을 주무르니 다시 95 이상으로 올라간 채 한동안 유지되기에 오늘은 아닌가 하며 안심한 순간 돌연 숫자가 0으로 바뀌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순간, 구십여 년을 움직이던 몸이 멈추는 순간…
갑자기 당한 일이어서 미처 준비가 부족했지만, 조문을 받지 않고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가족 추모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채비의 추모장례를 기획한 게 나였음에도 막상 당사자가 되어 내 일로 치르려니 잠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짝지와는 오래전에 상의한 바 있지만 다른 가족들 생각이 어떨지, 혹시 허접하게 모셨다는 후회가 들지는 않을지, 게다가 유가족들이 마음을 내고 실제 준비할 일이 꽤 있어 부담스러웠고 굳이 이렇게까지 퍼포먼스(?)를 해야 하나 하는 어색함,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도 있었으나 아무튼 추모식을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기록을 위해 작성한 부고에는 상주 대표로 고인의 두 딸을 올렸고 두 사위와 남자 조카 둘은 운구를, 둘째 손녀가 영정을 드는 것으로 성평등 장례를 시도했다.
통상 첫날 빈소를 차리고 지인들에게 알리느라 바쁜 대신 처가에 가서 앨범 사진과 유품을 정리했는데 사실 이 과정부터가 추모 과정이었다.
"아, 이런 물건도 있었네? 아버지가 여기도 여행하셨구나? 야, 이거 정말 옛날 사진이다."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두 딸과 사위는 아버님이 쓰던 안경, 등산 모자와 컵, 즐겨 보시던 뉴스위크지, 옛 지갑과 명함, 시계, 요가 서적 등을 챙겼다.
집에 와서 사진 스캔해서 영상 편집 할 사람에게 보내고 내가 그간 찍은 사진들을 별도로 모으니 벌써 열한 시다. 이제 조문보에 넣을 생애사를 써야 하는데 그간 틈틈이 메모하고 사진 찍어놓은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추모는 잊지 않는 것. 기억은 기록에서 나오고, 그래서 기록은 힘이 세다.
텅 빈 제단이 쓸쓸했는데 꽃집을 하는 친구 부부가 정성을 다해 백합과 흰장미로 만든 화환을 보내주어 아주 풍성해졌다. 입관식을 하는 사이 채비 플래너가 모니터를 설치하고 유품 테이블과 추가 꽃장식을 해놓았고 유족들과 친척 십여 명이 둘러앉으니 허전했던 방이 금방 따뜻한 추모식장으로 변했다.
조문보를 나눠주고 내가 장인의 생애사를 읽자 모두 미처 알지 못했던 고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다.
두 딸이 추도사를 읽은 후 끝으로 나도 장인을 추모하는 글을 읽었다.
"사위로 만난 지난 36년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을 이해합니다.'…
아버지와는 육체적, 기질적으로 같았다면 장인과는 문화적, 지적 동질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실로 내게는 두 분의 아버지가 있었던 셈이지요.
아버님을 떠올리면, 물끄러미 바라봐주던 분. 심연. 여러 겹 뒤에 있는 분. 끝내 하지 않은 말들…
우리가 영혼이 있어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깊은 얘길 다시 나누고 싶어요. 그때까지 안녕~"
끝부분에서 그만 울컥, 목이 메고 말았다.
친척분들이 장인의 젊은 시절을 들려주셨고 전체 행사도 진지하게 함께 해주셔서 고인에 대한 기억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더 풍성해졌다.
발인하는 셋째 날,
영정을 든 둘째 딸과 짝지와 처제가 대표 상주로 운구차에 탔으니 온전히 세 여자가 장인을 모신 셈이다. 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아들이었던 내가 상주를 맡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누나가 별말은 안 했지만, 섭섭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당시엔 여자가 영정을 드는 게 아니라는 지적에 직계 손녀 대신 사촌 동생이 들기도 했었다.
관행을 그냥 따르는 건 편하다. 이걸 원칙이나 신념을 갖고 다르게 행동하는 건 부담스럽지만 떳떳하다. 개방적이었던 고인도 반가워 하실 것 같다. 화장장으로 가는 길, 짙은 안개 사이로 먼동이 텄다.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거짓말처럼 일상으로 돌아와 멍하니 예능 프로를 보며 저녁을 먹었다. 며칠 전까지 이 세상 한 부분이었던 그 분이 이제 없다. 허전하고 텅 빈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래도 사흘간 오롯이 그분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어 충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