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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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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철수의 큰아들 김대호 머리숙여 감사인사드립니다

故 김철수의 큰아들, 김대호 머리 숙여 감사 인사드립니다. 머리 숙여 감사 인사 드립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제 아버지 故김철수(金哲洙)(1936.12.25~2014.12.20, 양력)를 제주 한라산 기슭(제주 조천읍 봉개동) 가족 묘역에 안장했습니다. 오래 전에 먼저 가신 저의 할아버지, 할머니 바로 앞 줄에 아버지를 묻었습니다.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 바로 다음날 12월23일 이었습니다. 모처럼 눈도 바람도 잠잠한 봄같은 겨울 날이었습니다. 여러 분의 조문과 위로, 격려, 명복 기원에 힘입어 장례를 잘 치렀고, 상심한 마음도 빨리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 喪을 계기로 홀로 남은 어머님과 3남2녀인 우리 가족의 유대는 훨씬 더 공고해 진 것 같습니다. 아버님 뜻을 받들어 가족끼리는 화목하게, 사회적으로는 널리 好評을 받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폭풍 속을 헤쳐 온 4일 이었습니다. 지난 12월 20일 저녁 6시30분 경에 퇴근 길 차 안에서 평소처럼 집에 전화를 했을 때는 (어머님 말씀이) 아버님이 감기 후유증으로 몸이 좀 불편하지만, 누워서 TV보면서 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전화를 바꿔 달라고 했더니 아버님이 손사래를 치셨다고 하더군요. 좀 이례적이었습니다. 그랬는데 8시 50분 경에 위독 소식을 들었고, 급거 삼천포 병원으로 향했는데, 전화 통화한 의사 선생님 말씀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8시 50분) 이미 운명 하셨다고 하더군요. 새벽에 병원 안치실에 도착해서 편히 잠드신 모습의 차가운 아버님을 뵙고, 맏 상주로서 장례 방식을 결정하고(발인 날짜, 매장? 화장?, 제주로 운구 방식 등), 장례를 치르고, 급한 후속 절차(사망신고 등)를 마무리했습니다. 돌아보니 참 적절한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3남2녀인데 누나, 동생, 매형, 매부, 아내, 어머니의 의견이 거의 다르지 않았고, tv드라마에 종종 나오는 눈쌀 찌푸리게 하는 갈등은 전혀 없었습니다. 조문 객들도 다 좋은 인상을 받고 가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의 마지막 순간을 정확히 모를 때는 5분만 빨리 응급 조치를 취했으면….. 그 놈의 허리, 무릎 통증 완화용 주사만 끊었어도….. 최소 2~3년은 더 사셨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황을 들어보니 모든 생명 에너지가 고갈된 자연사 징후가 역력 했습니다. 2~3일 전부터 죽음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는데 수술 후 종종 오는 그저 그런 증상인줄 알았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병원에 안 가겠다고 버티면서 토요일 저녁 8시에 하는 유일하게 좋아하던 TV드라마를 보시는데, 얼굴 등 징후가 정말 예사롭지 않아 8시33분에 119를 불렀고, 집 앞에 온 앰블란스를 타기 위해 (부축을 받아서) 외출복을 겨우겨우 입고 화장실 다녀와서 쓰러지셨답니다. 그 직후 들어온 119들것에 실려 집을 나서기 전에 손이 툭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시점, 20시 40분 전후해서 집에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심폐소생술 등 119매뉴얼대로 소생을 시도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답니다. 직접 사인은 2년 반 전에 앓았다가 (수술로 잡고, 항암 치료로 잘 다스려 온) 담도암이랍니다. 담도암의 예후를 잘 아는 의사들은 아버님의 생존과 건강을 일종의 기적처럼 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돌아가시기 하루 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동업자이자 절친인 박씨 아저씨와 비빔밥 점심을 같이 했다던데…..거의 드시지 않았지만…. 아무튼 2~3일 전부터 입맛이 싹 살아졌다고 하더군요. 동물도 자연사 하기 직전에는 곡기를 끊는다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팔자인지, 취향인지 몰라도 수많은 죽음과 자연적, 사회적, 인간적 섭리로 점철된 역사를 항상 머리에 이고 다니고, 무엇보다도 올해 들어서는 세월호, 세모녀, 김기원 교수, 이범 선배 등 너무 아깝고, 안타깝고, 서글픈 죽음을 접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기에, 향년 79세에 어찌보면 천수를 대충 누렸다고도 볼 수있는 아버님상이 그리 많은 눈물을 자아내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서글프지만 담담하게 보내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울컥울컥 불쑥불쑥 솟아 올랐습니다. 슬그머니 고개 돌려 구석으로 가서 눈물을 훔치길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시울과 콧잔등은 시도때도 없이 시큰그립니다. 아버님께서 자전거를 타고 (결혼 후 54년 이상) 수 만번도 더 오가던 삼천포 바닷가 길을 볼 때, 노년에 자주 가 계시던 곳(부두가 컨테이너 박스)을 볼 때, 하루 전까지 타고 스스로 병원을 오가던 낡은 자전거를 볼 때, 아버님 핸드폰 통화기록을 살피다가 (아마도 돌아가시기 5분 전쯤 일 것 같은) 20일 저녁 20시 33분에 119로 전화한 통화 기록을 볼 때, 21일 새벽 병원 도착하여 안치실 냉동고에서 막 나와, 흔들면 그냥 깨어나실 것 같은 편안한 모습의 얼굴을 ?을 때, 22일 입관식 직전, 누가 봐도 이 세상 사람 같지도 않고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로 삼베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을 때, 오동나무 '관'을 화물 컨테이너에 실을 때, 제주 안장 후 탈상 식까지 마쳤을 때, 20일 밤과 21일 새벽에 카톡, 밴드, 페이스북으로 부음을 알리는 글을 쓸 때….. 무엇보다도 특별히 기대를 많이 받은 장남이자, 아버님의 보람이자, 희망이자, 자부심이었던 제가 무기정학(1983.5.13)-두번의 징역-제적-위장 취업(공장 활동)차 1년 여 잠수 등 아버님 가슴을 찢어발겨 놓은 수많은 기억들이 밀고 올라 올 때, 저 못지 않게 부모님의 가슴을 아프게 한 그 때 그 운동권의 상당수가 이젠 진보판 '어버이 연합' 이 되어 더 이상 역사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상실하고 늙은이, 중늙은이가 되어 가는 현실이 생각날 때, 압축적으로 성장한 그 속도로 압축적으로 늙고 쇠락하고 퇴행해 가는 대한민국 현실을 볼 때, 초심을 간직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질기게 노력했지만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아니 1980년대 같이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과 여의도 정치업자들조차도 김대호가 왜 저런 일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수많은 기억들, 추억들, 생각들이 굳게 잠긴 눈물의 수도꼭지를 틀어 댔습니다. 특히 아쉬운 것은 아버님의 인생을 기록한 자서전 작업을 마무리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10년 쯤 전에 기획해서 제 아버지와 장인 어른 자서전부터 먼저 내보려했는데 결국 2010년 지방선거 를 계기로 관악구청을 통해 실현했고, 2014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서울시 사업으로 채택됐습니다.) 지난 2년 여 동안 아버님과 제가 동행할 때면 제가 캐묻고 아버지가 답한 대화 수십 개를 녹취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풀어서 다듬고 추가 보완 인터뷰를 해야 비로소 자서전이 되는데, 아버님이 2~3년은 거뜬하실 것 같아서, 급한 일 먼저 하고 나서 자서전 작업을 하려고 했는데 그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8~9월 벌초 때(비석 세울 때) 아니면 1주기 때는 자서전을 낼까 합니다. 토요일 밤, 일요일 밤, 월요일 밤은 빈소의 아버님 영정 앞에서 잠깐씩 눈을 붙였습니다. 아버님 생각만 하다가 잤기에 혹시 꿈에서라도 잠깐 뵐 수 있을까 했는데, 전혀 뵙지 못했습니다. 안 나타나시더군요. 잠만 잘 잤습니다. 하긴 돌아가신 아버님은 제가 경찰에 잡혀만 가면 예외없이 1967년에 돌아가신 아버님(저에게는 할아버지)이 꿈에 나타났다고 했으니, 꿈에 아버님을 뵙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 인 듯 합니다. 사실 1984년, 85년 대형시위를 앞두고 검문검색을 통해 마구잡이로 연행할 때, 경찰서에 잡혀는 갔지만 하루 밤만 자고 풀려난 적이 두어 번 정도 되는데, 그 땐 집에 연락이 안갔는데, 아버님은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났다고 하더군. 물론 저는 아무일 도 없었다고 잡아 떼고 아버님은 이상하다고 고개 갸웃거리고……. 4.3사건 당시 이덕구 유격대장의 집(신촌리 2016번지)에서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집(신촌리 2018번지)에 사신 할아버지는 4.3의 상흔이 너무나 깊어서인지 돌아가셔서도 손자가 경찰에 잡혀가면, 이를 알려주려 아버님 꿈에 나타나셨나 봅니다. 제대로 연락도 못했는데, (자식 놈이 헛 살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근조 화환과 부의에, 또 서울, 경기, 청주, 대전, 대구, 광주, 진주 등 멀리서 찾아온 수많은 조문객들에게 많이 놀라고 감사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경조사 하나는 무조건 챙기는) 큰 조직에 속해 있지도 않고, 폼 나는 공직에도 가 보지 못했고, 가치는 좀 있을지 몰라도 돈은 별로 안되는 일을 외롭게 질기게 하고 있는데 대한 안스러움 등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마음 씀씀이에 다시금 놀라고 감사합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보니 제가 평소 주변을 돌아보고, 경조사를 챙기고, 배려하는 일에 참 인색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받는 것과 주는 것의 가치와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철이 드는 것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앞으로 댁에 경조사가 터지면 저에게도 마음을 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자식들을 얼마나 편하게 해 주셨는지를 수십 번도 더 절감했습니다. 아버님은 지금 껏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셨습니다. 의료보험도 치료비도 거의 스스로 해결 했습니다. 제가 챙겨야 할 친인척 경조사를 제 이름으로 직접 챙기셨습니다. 아버님을 제주 선영에 안장하게 된 것도 1977년 경 아버님과 몇몇 친척 분이 약간의 돈을 추렴하여 800평의 가족 묘를 미리 장만 해 뒀기 때문입니다. 그 때 어린 마음에 뭣 땜시 저런 일을 하나 하는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아버님이 지고 있던 짐의 상당 부분을 제가 지고 갈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 활동 자체가 엄청나게 복잡하고 정교한 물리,화학적 작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 살아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기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공교롭게 장례식장에는 같은 날 사망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29세 청년 이었습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망년회 폭탄주 몇 잔 마시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더군요. 정말로 황당하고 쓸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 부모의 통곡 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여지껏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고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이 어디쯤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규명하는 경세담론을 연구해 왔고, 대한민국과 한민족이 바로 가도록 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낡은 것은 사라졌지만 새 것은 오지 않은, 총체적 혼미, 혼돈기인 지금이야 말로 제가 본격적으로 역할을 해야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몸 관리, 마음 관리, 생각 관리, 관계 관리를 잘 해놓고, 혼신의 힘을 다해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행여 몸 때문에 제가 맡은바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개인적으로 억울하기도 하거니와, 아버님께는 큰 불효고, 조국에는 큰 불충이라고 생각합니다. 빈소를 직간접적으로 찾아주신 분들, 귀한 부의와 화환을 보내 주신 분들, 위로, 격려 해 주시고 아버님 명복을 빌어 주신 분들께 다시금 머리 숙여 감사 인사 드립니다. 여러 분의 기대, 배려와 아버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4.12.26 자랑스런 아버지 故김철수(金哲洙)의 큰 아들 김대호(金大鎬) 拜上 [수정][삭제]

김대호 조합원
2020. 05.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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